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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홍범도 장군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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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기사입력 2020-06-18

 

지난 6월 7일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항일 전투 승리는 제대로 된 기억도 없이 지나갔다. 코로나 19의 심상치 않은 재 확진이 봉오동전투를 기리는 마음을 누른 듯하다. 그럼에도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 기려야 한다.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이 남양 홍 씨이니 수원과 화성과도 인연이 있다. 아마도 윗대의 조상이 이 지역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봉오동 전투의 위대한 승리자인 홍범도 장군은 80년대까지 우리 역사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에 가려진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역사가들이 홍범도 장군을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좌진 장군이 명문 가문인 안동 김 씨 출신의 양반 가문의 일원인 반면 홍범도 장군은 머슴 출신이었다. 머슴이 노비나 천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집안 출신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양반 사대부 출신들을 중요시 여기던 우리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머슴 출신인 홍범도 장군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항일투쟁시기 양반사대부 출신들은 상당수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포기를 하거나 변절을 하였다. 1919년 3.1 만세 투쟁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인중 양반사대부 출신은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 중인이거나 평민 출신들이었다.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던 이들은 오히려 민중들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이다.

 

홍범도는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도 없었고,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정의롭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는 자라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직접 겪었고, 그 부조리를 정의로움으로 바꾸고 싶었다. 가난 때문에 입대한 군대의 부조리에 항거하고, 종이를 만드는 공장의 주인의 억압에도 항거했다. 많이 배운 이들이 불의(不義)를 주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기도 하고 나라를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가난하지만 따스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가난 때문에 승려가 되었던 시절에 사명대사와 서산대사의 항일투쟁을 들으며 민족의 자주를 생각했다. 홍범도가 평안도, 함경도에서 의병 투쟁을 일으킨 것도 외세로 인하여 고통 받는 민초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민초가 민초를 위해 일어선 것이다.

 

일본 토벌군이 그의 아내와 자식을 감옥에 넣고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여도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큰 아들이 홍범도 부대로 와서 항복해달라고 요청을 했을 때 오히려 아들을 데리고 나가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들의 귀에 총을 쏘기도 했다. 홍범도의 아들은 아버지의 불굴의 의지를 확인하고 의병이 되어 최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이듬해 전사하였다. 홍범도의 아내는 감옥에서 남편에 대한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다가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양반사대부와 중인이나 평민 중에서 경제적으로 기득권인 사람들이 일제와 협력하여 온갖 부귀를 누릴 때 홍범도의 가족들은 모두 죽음에 이른 것이다.

 

홍범도는 일제의 강력한 탄력으로 한반도 안에서의 독립투쟁이 힘들다는 것을 실사구시 적으로 인식하고 장기적 투쟁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톡과 간도 일대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이 사이 양반 사대부 출신의 의병장은 유인석 등을 포함하여 얼마 남지 않았다.

 

홍범도는 독립투쟁을 하면서 동학과 대종교의 평등사상과 자주 의식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늘 동료들에게 존중의 모습을 보이고, 스스로 나서 전투에 임했다.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차지 않고 장총 두 자루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전투 시에 가장 앞에서 백발백중의 사격술로 적들을 제압했다.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홍범도 부대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그와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었다. 지도자가 맨 앞에서 전투를 지휘하는데 부대원들이 뒤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결과 봉오동 전투라는 위대한 승리와 청산리 전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성숙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집권하고 이승만 시대부터 노태우 시대까지 독재정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위핸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꽃을 피었다.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바로 홍범도 장군의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통일 한국이 되는 것도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투쟁 때문이다.

 

최근 봉오동 전투 100주년, 청산리 전투 100주년 등 항일 투쟁의 빛나는 승리를 외면하면서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일본의 우리 여성들에 대한 성 착취와 학대를 사과하고 배상하라는 수요 집회를 없애라고 한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고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항일운동의 역사를 현양하고 그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올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와 우리 땅에 모시는 것은 너무도 잘한 일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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